[현장+] 무심한 정부와 만만한 라면

김제영 기자 승인 2023.06.27 08:20 | 최종 수정 2023.06.27 09:19 의견 0
김제영 생활경제부 기자

[한국정경신문=김제영 기자] 쌀이 부족하던 시절 국민의 주식(主食)을 대체했던 라면은 ‘환갑’을 맞이한 올해도 여전히 대표 서민식품이다. 한국 최초로 출시된 라면 가격은 10원. 라면 값은 저렴해야 한다는 인식 속에서 15원짜리 짜장면이 오늘날 6000원을 넘는 사이, 라면 가격은 봉지 당 1000원이 안 된다.

저렴해야 하는 라면은 결국 물가인상의 표적이 됐다. 지난 주말 추경호 경제부총리의 라면 가격 인하 발언은 무심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추 부총리는 라면 가격의 적정성을 평가할 때 ‘국제 밀 가격’을 근거로 내세웠다. 작년 하반기 원자재 가격 인상을 이유로 제품 가격을 올렸는데, 현재 밀의 경우 당시보다 50% 안팎 내렸으니 가격을 인하하라는 권고다.

실제로 국제 밀 가격은 하락세지만, 중요한 건 이 추세가 실제로 국내 라면 제조사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영되느냐다. 우선 해외선물거래소의 국제 밀 가격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1차 생산·재배된 곡물인 ‘밀’ 가격이다. 그런데 라면 제조사의 경우 해외에서 밀을 직접 구매하는 게 아닌 국내 제분사를 통해 정제·가공된 ‘밀가루’를 구매해 사용한다.

제조사는 제분사에서 밀가루를 구매할 때 통상 6개월~1년 단위의 제품 공급 계약을 맺는다. 현 시점에 국제 밀 가격의 등락과 관계없이 계약된 가격으로 밀가루를 공급받는다는 의미다. 실제로 라면업계는 글로벌 원자재 가격이 제품의 원가에 반영되기까지 시차가 존재하는데, 이 기간이 최소 6개월 이상이라고 설명한다.

더욱이 라면의 원가에서 밀가루가 차지하는 비중은 30% 내외다. 그런데 밀 가격을 제외한 팜유·설탕·전분 등 다른 원재료 가격은 여전히 오르고 있다. 원재료 가격 밖으로는 인건비와 물류비,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까지 줄줄이 오른 상태다. 글로벌 원재료 가격은 등락이 존재하지만, 이 같은 요금의 경우 더구나 떨어지지 않는 고정비다.

물가가 안정되지 않는 이유는 고정 원가 비용이 안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외식 물가의 경우 완전자유경쟁 시장에서 다수의 개별 자영업자에 의해 형성되는 시장 가격인 만큼 식품 제조사의 가공식품 가격 만치 통제하기도 어렵다. 실제로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8대 외식 품목 중에서 가장 저렴한 김밥과 자장면 서울 지역 평균 가격이 5년 전(2018년)보다 각각 46%, 40% 올랐다. 가장 비싼 품목은 삼겹살(1만9150원)로 2만원에 육박했다.

만만한 건 결국 라면이었다. 라면은 지난해로 두 차례 연속적인 가격 인상을 거쳤지만, 직장인과 학생의 점심 한 끼를 때울 수 있도록 여전히 1000원~2000원 내외의 저렴한 가격대로 형성돼 있다. 탄생 이래 60년 간 서민 식품이라는 특수성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고물가 시대에도 이만한 값에 판매된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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