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저성장을 넘어 제로성장을 향해 가고 있다. 잠재성장률이 계속 떨어지면 1% 이하의 낮은 물가 상승률이 동반된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복사판 수순이다. 이는 한국이 장기 경기 침체에 빠질 위기라는 경고다. 잠재성장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면 저성장·저물가 국면으로 진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연쇄 작용으로 통화정책의 유효성이 제한되고 자산 가격이 상승 압력을 받을 수 있다. 낮은 인플레이션이 굳어지면 실질 금리 하락을 제약한다. 경기 대응을 위한 통화정책의 효과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저성장·저물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구조 개혁을 통해 성장 잠재력을 키워야 한다. 기술 혁신을 위한 대규모 투자 확대, 인공지능(AI) 규제 재검토, 신규기업 진입 활성 등 시장규제 완화가 중요한 과제다.
주식시장의 ‘코리아디스카운트’ 해결도 시급한 과제다. 기업 수익성과 자산 가치에 비해 주식 가치가 크게 저평가 되고 있다. 기업들은 자사주 취득 및 소각, 밸류업 공시를 통해 저평가 돌파 노력을 기울인다.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 확대 등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기업 지배구조 선진화를 위한 법제도 정비가 병행돼야 체질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 단기적인 이벤트로는 코리아디스카운트를 해결 할 수 없다. 지배구조 개혁이 동반되는 정책만이 저평가 분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
한국정경신문 창간 15주년을 맞아 저성장, 저물가, 저평가를 돌파하기 위한 산업 분야별 기업들의 구조개혁과 정책을 짚어본다. 이를 통해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크래프톤과 엔씨의 대표작 ‘PUBG: 배틀그라운드’와 ‘리니지M’ (자료=각 사)
[한국정경신문=변동휘 기자] 게임업계는 최근 수년간 글로벌 경기 불황의 직격탄을 맞으며 성장 정체에 직면했다. 소비 위축으로 인해 실적 부진의 늪에 빠지며 다수의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여기에 과도한 확률형 아이템에 대한 이용자들의 반발이 커지며 PC·콘솔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더욱 가속화됐다.
비록 처한 상황은 상반된 형태이지만 크래프톤과 엔씨소프트는 같은 해법을 제시하고 나섰다. 바로 신규 IP(지식재산권) 창출에 대한 집중적 투자다. 신작 개발은 물론 외부 퍼블리싱과 전략적 투자 등 다양한 방식으로 포트폴리오를 넓혀 흥행 가능성을 높이는 전략이다.
흥행산업이라는 특성상 게임의 성과가 기업가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게임업계에도 주주환원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는 형국이다. 이에 따라 유동성 확보와 효율적인 자원배분이 관건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 자체 개발부터 M&A까지..히트작 확보 총력
엔씨소프트는 지난해 연간 적자를 내는 등 실적 부진에 빠진 상태다. 이를 탈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규 IP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리니지’와 MMORPG에 편중된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함으로써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가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서브컬처·슈팅·액션 RPG 장르를 중심으로 연간 600억~700억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할 방침이다. 지난해 해외 게임사 2곳과 국내 개발사 2곳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하는 등 퍼블리싱으로도 영역을 확대했다. 특히 슈팅 장르를 회사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지목하고 그 범주 내에서 세부 장르가 다른 게임들을 다양하게 선보이며 장르 클러스터를 형성하겠다는 전략이다.
크래프톤이 신규 IP 프랜차이즈로 키우고 있는 ‘인조이’ (자료=크래프톤)
크래프톤 역시 신규 IP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PUBG: 배틀그라운드’가 견조한 성과를 보이고 있지만 그 뒤를 이을 차기 프랜차이즈가 필요해진 것이다. ‘빅 IP 프랜차이즈’ 확보를 위해 향후 5년간 연간 3000억원씩을 신작 개발에 투자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를 바탕으로 연매출 7조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수립했다.
자체 개발작으로는 지난 3월 ‘인조이’의 얼리 액세스를 시작한 상태이며 자회사 언노운 월즈의 ‘서브노티카2’도 주요 신작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PUBG IP 기반의 신작 ▲프로젝트 블랙버짓 ▲프로젝트 발러 ▲PUBG: 블라인드스팟 등도 개발 중이다. 퍼블리싱작으로는 ‘딩컴’을 확보했으며 최근 카카오게임즈가 보유했던 넵튠 지분을 인수하는 등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다.
■ 본업 경쟁력 강화..지속성장 기반 마련
이 같은 행보는 게임회사의 본원적 경쟁력에서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그간 국내 주요 게임사들은 엔터테인먼트부터 부동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비게임 사업에 눈독을 들였다. 하지만 글로벌 게임업계 전체가 불황에 접어들자 결국 본업인 게임에서의 경쟁력에 집중하는 기조로 선회하는 것이다.
특히 이는 기존 IP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넘어 신규 흥행 프랜차이즈를 지속 발굴해 나가는 것이 장기적인 성장성 확보에 중요하다는 인식으로 해석된다. 단일 IP의 생명력을 장기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사례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야 더욱 큰 성장으로 이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관련해 크래프톤 김창한 대표는 “게임회사의 기업가치는 빅 IP 프랜차이즈에 달려 있으며 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결국 경쟁력 있는 IP를 획득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업계 전문가도 이 부분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다. 한국게임정책학회 이재홍 학회장은 “자동차 업계 등 제조산업도 페이스리프트나 풀체인지 등으로 브랜드 가치를 강화하기도 하지만 미리 차기작을 기획하며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한다”며 “국내 게임업계도 글로벌 보편성을 갖춘 IP를 창출해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순수하게 게임으로 경쟁할 때”라고 지적했다.
왼쪽부터 엔씨소프트 김택진, 박병무 대표. (자료=엔씨소프트)
■ 커지는 주주들의 목소리..성장-환원 균형 필요
지난해 국내 산업계의 주요 화두 중 하나로 ‘밸류업’이 떠오름에 따라 게임업계에도 주주환원의 파도가 다다른 상황이다. 지난해 4분기 및 연간 실적발표와 정기주주총회 시즌을 거치면서 게임사들의 주주환원 정책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지는 형국이다.
엔씨소프트는 어려운 상황에도 주주친화적 기조를 유지하는 모습이다. 지난 3월 주당 1460원의 현금배당을 실시하고 연간 연결 당기순이익의 30%를 현금배당하는 내용의 3개년 주주환원 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이와 함께 자사주 41만주를 소각했다. 발행주식총수의 1.9%에 해당하는 분량으로 그 규모는 1269억2575만원 수준이었다.
크래프톤의 경우 올해까지 3개년 주주환원정책을 시행 중이다. 전년도 잉여현금흐름에서 투자금액을 제외한 금액의 40% 이내에서 자사주 매입 및 소각을 실시하는 내용이 골자다. 내년 정기주주총회에서는 새로운 3개년 주주환원 정책이 발표될 것으로 예상된다. 관련해 회사 측은 지난 3월 정기주주총회에서 배당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와 관련해서는 적절한 자원배분이 중요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서는 히트 IP 창출이 필요하며 이는 지속적인 투자가 이어져야 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업계 전반에 걸쳐 실적개선의 신호가 관측되고 있지만 이는 대부분 구조조정 등 비용통제에 따른 결과다. 때문에 성장성 확보를 위한 투자도 도외시돼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확률형 아이템으로부터의 탈피와 PC·콘솔로의 패러다임 전환에 직면하는 등 변곡점을 맞이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며 “주주가치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큰 성장을 통해 그 파이를 키울 수도 있는 만큼 미래 먹거리를 위한 투자와 주주환원 간의 균형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