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경신문=임윤희 기자] 재계의 연말 조직 개편 무대에 젊은 오너들이 본격적으로 올라섰다. 단순한 ‘후계자’가 아니라 업계 최전선에서 실적과 의사결정으로 평가받는 자리에서 주목받는다. 이들은 부모세대의 노후한 포트폴리오를 손보고 새로운 성장축을 세워야 하는 과제 앞에 놓였다. 친환경·디지털 전환과 신사업, 글로벌 확장이 겹친 지금이 승부처다. 여기서 내놓는 전략이 기업의 ‘다음 10년’의 먹거리를 책임지게 된다. 막을 올린 뉴 리더십이 어떤 방향을 제시할지 변화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 참석해 글로벌 기업들과 탈탄소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사진=HD현대)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통합, 미국, 100조로 요약되는 새 성장 공식을 꺼내 들었다. ‘승계 관리’에서 ‘실적·성장’ 국면으로 승부처를 옮긴 것이다.

정 회장은 이달 초 울산 HD현대중공업에서 1박 2일 그룹 경영전략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향후 5년 내 그룹 매출 100조원과 대미 조선·방산 프로젝트 확대를 과제로 제시했다.

이번 전략회의는 정 회장이 회장 취임 후 처음으로 그룹의 중장기 목표를 숫자로 못 박은 자리다. 그런만큼 HD한국조선해양, HD현대중공업, HD현대오일뱅크, HD현대마린솔루션 등 주요 계열사 대표와 경영진 30여 명이 참석했다. 조선·에너지·건설기계·서비스까지 전 사업부문의 5년 로드맵과 투자 계획을 점검한 것이다.

이날 HD현대가 제시한 큰 축은 셋이다. ▲친환경·디지털·AI 전환으로 기존 사업의 체질을 바꾸고 ▲조선·에너지 등 핵심 사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더 끌어올리며 ▲로봇·자율운항·SMR(소형모듈원전) 같은 신성장 사업을 키워 ‘포트폴리오형 성장’을 구현하겠다는 구상이다.

시장 환경은 녹록지 않다. 미국·유럽의 보호무역과 현지 생산 요구, 중국 조선·기계 업체의 추격까지 겹쳤다. 기존 방식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뚜렷하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매출 100조원 비전은 ‘낙관 시나리오’가 아니라 통합과 체질 개선 없이는 버티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의 반영이다.

조선·건설기계 통합은 정기선 체제가 꺼낸 1순위 카드다. HD현대는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를 합병해 12월 1일 ‘통합 HD현대중공업’을 출범했다. 상선·특수선·방산선을 한 법인 아래 묶는 종합 조선 체계를 구축했다. 주문·설계·생산·A/S가 회사별로 쪼개져 있던 구조를 단일 체계로 묶어 원가·인력·설비를 그룹 차원에서 조정하겠다는 계산이다.

건설장비 부문에서도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 합병을 추진해 굴삭기·지게차·엔진 등 글로벌 제품군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묶는다. 브랜드 정비와 판매 네트워크 통합을 통해 수익성을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정 회장이 겨냥하는 바깥 무대는 미국이다. 그는 10월 ‘APEC 2025 퓨처 테크 포럼’ 조선 세션 기조연설에서 “HD현대는 미국의 해양 르네상스를 함께할 준비가 된 든든한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그는 미 해군·해안경비대 함정 건조와 민수선박, 조선소 재건 프로젝트를 한데 묶은 ‘MASGA’ 구상을 내놓고 이를 HD현대의 대미 조선·방산 사업 확대 전략과 연결했다.

HD현대가 이미 미국 조선소 인수 검토, 현지 방산·기술 기업과의 협업, 자율운항·로봇·전기추진 등 신기술 실증을 진행해온 만큼 이번 100조 로드맵도 사실상 미국 프로젝트를 핵심 성장 엔진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공식화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국내 수주 경쟁을 넘어 미국 인프라·방산 시장까지 겨냥한 ‘플랫폼 플레이어’로 올라서겠다는 구상이다.

에너지·전력·신사업도 100조 로드맵의 핵심 축이다. 정유·석유화학 부문은 고부가 제품 비중을 키우고 공정 효율과 원가 경쟁력을 높여 정제 마진 변동에 덜 흔들리는 구조로 바꾼다는 계획이다.​

전력기기 사업은 변압기·차단기 생산 능력을 늘리고 중·저압 차단기 시장 점유율을 확대해 글로벌 전력 인프라 투자 증가를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HD현대는 여기에 로보틱스, 자율운항·전기추진 시스템, 연료전지, SMR 등을 미래 신사업으로 키워 조선·에너지와 묶은 ‘패키지형 솔루션’을 내놓겠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정 회장은 회의에서 “지금이 우리 그룹의 변화와 도약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라며 “주력 사업들이 직면한 엄중한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리더들부터 HD현대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해 그룹의 미래를 준비해 달라”고 주문했다.

재계에서는 10월 회장 승진과 조선·건설기계 합병, 12월 전략회의와 100조 로드맵까지 이어진 행보를 두고 “정기선 체제의 성적표 시즌이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통합과 재편, 미국과 100조를 한 축으로 묶은 이번 승부수가 향후 5년 안에 실제 실적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뉴 HD현대’가 맞는 첫 시험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