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칼럼] 백범시해, 안두희는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에 불과했다

-춘추필법으로 본 백범시해사건의 주범은?

김재성 주필 승인 2019.06.28 10:38 의견 3
 

[한국정경신문=김재성주필] 70년 전인 1949년 6월 26일 12시 45분 경, 서울 종로구 신문로 경교장 2층에서 3발의 총성이 울렸다. 안두희가 백범 김 구 선생의 가슴을 향해 쏜 총성이다. 이로써 해방된 조국은 반공을 앞세운 친일파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안두희의 최종 배후에 대해서는 민족의 궁금지사다. 물론 심증은 있다. 다만 물증이 없을 뿐이다. 최근 미국의 비밀해제로 안두희가 우익 테러조직인 백의사 소속이었으며 그들은 '염동진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들'이라는 내용이 밝혀졌다. 당시 미 제1군 정보참모부 요원이었던 죠지 실러의 <김구 암살에 관한 배후정보(Kim Koo; Backgraund Information Concerming Assassination)>라는 보고서 내용이다. 하지만 이 보고서도 심증의 일부를 확인해 줄 뿐 최종배후에 접근하지는 못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건은 직접 행위자가 있고 그를 사주한 배후가 있다. 그 배후는 당시 혹은 당대에는 드러나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드러나게 돼 있다. 그래서 역사는 행위자가 아니라 그를 사주한 최종 배후를 원흉으로 기록한다. 

조선조 선비들이 법관이 판례를 읽듯이 죽을 때까지 춘추(春秋)를 읽은 것은 춘추필법이 숨은 악, 드러나지 않은 배후를 지목해 탄핵하는데 추상같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서기전 607년 진(晉) 영공(靈公) 시해사건이다. 

<영공은 혼암한 군주였다. 곰발바닥이 설익었다고 요리사를 죽이고 행인들을 향해 탄궁을 쏘아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깔깔대고 낙화의 미를 보기 위해 누대 위에서 궁녀를 아래로 집어던졌다. 원로재상 조돈(趙盾 인명일 때는 ‘돈’)은 그 때마다 어린 영공을 타이르듯 간했다. 그것도 한두 번, 영공은 조돈을 귀찮게 여겨 세 번이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마침내 조돈이 국외망명을 결심하고 떠나다가 조카 조천(趙穿)을 만났다. ‘조금만 기다리라’던 조천이 그 길로 군사들을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 영공을 죽였다. 조돈은 망명길에서 돌아와 사태를 수습했다.
이에 사관 동호(董狐)가 엉뚱하게 <조돈이 그 임금을 시해했다>고 기록했다. 조돈이 “나는 당시에 도성에 있지도 않았다”며 항의했다. 동호가 대답했다. “그대는 국정 최고 책임자로 국내에 있었다. 그리고 돌아와 시해범을 처벌하지 않았다.” 조돈은 아무 말 못하고 돌아섰다.>

이 기사는 갑론을박이 있었던 듯 126년 후 공자가 <가을 구월 을축일에 진나라 조돈이 그 임금 이고를 시해했다. 秋九月乙丑 晉趙盾弑其君 夷皐> 로 정리 했다. 그리고 동호의 직필을 칭찬하고 조돈이 시해범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음을 아쉬워했다. 물론 영공도 그 이름을 기록해 같이 폄하했다.   

백범 시해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15년으로 감형되고 나중에는 특사로 풀려나 군에 복귀해 소령으로 진급까지 했다. 제대 후에는 이승만의 보살핌으로 군납사업을 해 돈도 크게 벌었다. 이승만은 6.25 이틀 후 27일 새벽 몰래 서울을 빠져나가면서 안두희를 형 집행정지로 석방해 데리고 갔다. 

또 하나 의미심장한 비화가 있다. 일제하에서 경찰서장을 역임한 윤우경이란 사람이 있다. 사람이 성실해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는데 ‘반민특위’에 입건돼 경찰 옷을 벗었다. 이를 이승만이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지시해 헌병 대위로 특채한 후 49년 6월 20일부터 실무 견습을 거쳐 6월 26일 안두희가 잡혀오자 조사를 담당했다. 이쯤 되면 안두희는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에 불과했음이 분명해진다.

이 사건을 공자가 춘추필법대로 기록한다면 누구를 원흉으로 지목할까.

저작권자 <지식과 문화가 있는 뉴스> ⓒ한국정경신문 | 상업적 용도로 무단 전제, 재배포를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