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병희의 그림이 있는 풍경] “나는 오늘도 터미널을 찾는다”

반병희 칼럼니스트 승인 2023.02.01 08:05 | 최종 수정 2023.02.01 14:18 의견 0
서울 강남고속버스 터미널. 필부필부의 사연을 담기엔 바닥이 지나치게 세련됐다. [사진=반병희]

고속버스터미널을 자주 찾는다. 집에서 걸어 10분이다. 가끔은 퇴근길에 들른다. 대합실이 목적지다.

저녁 8시 또는 9시, 어느 때는 밤10시. 특정한 시간대는 없다. 번잡함이 조금 누그러질 때가 이 무렵이다. 머무는 시간도 대중이 없다. 휙 돌아본 뒤 바로 나오기도 하고, 필(feel)이 꽂히면 1시간 이상도 머문다.

정해 놓은 요일 역시 딱히 없다. 토, 일요일이 편하긴 하지만 빈도수로 치면 금요일 밤이 가장 많지 않을까 싶다. 금요일 밤은 아무래도 설레임이 더하니까.

누구를 배웅하거나 마중하는,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간다. 무심하게. 익숙한 의식(儀式)이다.

한파나 장마와 같은 불편한 날, TV뉴스에서 무슨 무슨 주의보를 들먹이며 요란하게 떠들면 다른 일정이 없는 한 어김없이 들른다.

왜 그런지는 정확히 답을 못하겠다. 굳이 생각해보자면,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합실에서 해야 하는 일도 없다. 멍하니 앉아 있거나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대부분이다. 무료하다 싶으면 실내를 한 바퀴 돈다. 그리곤 다시 앉는다.

이리저리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는 갖가지 소음을 빨아올리는 높은 천정에 시선을 고정한다. 서커스 무대의 그물망, 천정의 양쪽 끝을 연결해 길게 쳐 놓은 그물망이 있다. 고깃집 연기 흡입 연통과 같은 집음(集音)용 대형 그물망이다. 투명해 보이질 않을 뿐이다. 사람들은 대합실 또 다른 우주, 즉 정지된 세상이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소란. 침묵. 그물망 위의 정적. 뒤이은 고요. 다시 침묵. 대합실로의 귀환. 숨소리.

내가 애써 소리를 보태지 않아도 되는, 대합실이 나를 숨길 수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화석화되지 않은 것을 꼽으라면 하나가 있기는 하다.

떠나는 이, 오는 이, 기다리는 이를 구경하는 일이다. 정교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끌거나 메고 있는, 들고 있는 가방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때만은 진지해진다.

소매치기를 위한 준비 동작이나 주인이 자리를 비운 틈에 ‘슬쩍’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럴 위인도 못된다. 멀찍이서 위아래를 천천히 훑어 볼 뿐이다.

가방엔 그들이 지난 여름부터 갖고 온 태양과 비바람이 담겨 있다. 그가 평생 등에 지고 온 시간의 짐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만이 스스로 덜어 내야 할 숙명도 거기에 있다. 가방의 무게다.

가방에 대한 견적을 마치면 내 시선은 주인의 얼굴로 옮겨 간다. 곁눈질로 꽤나 상세히 관찰을 한다.

나이, 성별, 신발, 머리스타일에 옷차림, 귀밑 터럭과 앉아 있는 자세까지 스캔을 마치면 나만 읽을 수 있는 스토리가 탄생한다.

엊그제다.

거의 열흘 가까이 영하 10도 위아래를 오르내리다 급기야 낮 최고 영하 14도, 최저 영하 19도, 체감온도 영한 23도를 기록하는 날이었다.

밤 9시 반이 넘어 내피가 붙은 등산복 바지에, ‘짜가’ 캐나다구스 파커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늦었다고 하기에는 어사무사한 시간대이었음에도, 길가는 이가 없었다. 8차선 대로 역시 승용차는 물론 택시조차 없었다. 칼바람이 활주로 처럼 넓은 텅빈 도로 위를 맹렬히 달려 나갔다.

대합실은 훈훈했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올 사람은 왔는지 대합실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소음으로 가득했을 공간이 스산하기 조차 했다. 대리석인지 타일인지 호사스러운 바닥이 부조화였다. 고급 백화점에서나 볼 법한 안락의자와 돌 벤치가 낯설었다. 이날 따라 모든게 어색했다.

보따리가 눈에 들어왔다.

현란한 디자인의 유명 브랜드가 여기저기서 쉽게 눈에 띌 정도로 여행가방(캐리어) 전시장과도 같은 대합실에서 보따리다. 의자에 놓인 남색 보따리는 의연했다.

적당한 크기에 정성스럽게 매듭을 했다. 소담스러웠다. 주인이 참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릎 높이에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의 캐리어도 잘 어울렸다.

70이 넘은 할머니였다. 주인이었다. 빈 입을 오물거리며 실룩일 때마다 잔주름이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화장을 한 흔적이 없는 얼굴은 솔직했다. 그을리고 탄 피부는 그의 이력을 짐작케 했다. 값비싼 피부 방부제와 보톡스, 세련된 말투의 도시 ‘할주머니’와는 한참 멀어 보였다. 잊혀진 친숙함이 다가왔다. 반가웠다.

깨긋한 치마저고리 위에 겨울용 겉옷을 바쳐 입었지만 도시의 밤 추위를 이기기에는 무리인 듯 했다.

‘이런 날은 치마저고리가 아니라 두툼한 바지와 잠바를 입어야 하는데, 노인이 고생하겠네’

곱게 빗어 흘려 넘긴 뒤 비녀로 쪽 지은 머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모자를 쓰거나 수건을 두르기엔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조금 지친 듯한 모습에 이따금 두리 번 거리거는 것으로 보아 방금 버스에서 내린 것 같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아마도 40대나 50대 초로의 아들이 곧 나타나겠지. 그리고는 ‘엄마, 이 추운데 뭘 이런 걸 싸갖고 오느라 이런 고생을 해요? 내가 여러 차례 아무것도 갖고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라고 핀잔으로 첫 인삿말을 대신하겠지.

아니다. 이렇게 시작할 수도 있다. ‘엄마, 많이 기다리셨지요? 허기지지 않아요? 고생하셨어요. 얼른 집에 가서 따듯한 국물을 드셔요. 집사람이 저녁 준비해 놓았어요.’

노인의 가방엔 뭐가 들었을까? 시루떡? 아들이 좋아하는 조청? 아니면 손자 손녀를 위한 강정? 다식?

설사 살가운 아들을 맞는다 해도 가방은 우리들 속의 이방인이다. 그를 오게 하고 떠나게 한다. 하나하나의 전설을 담고.

‘저 사람의 가방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10년 뒤?’ ‘보따리로 남을까? 캐리어로 남을까?’ ‘떠나는 이가 될까? 오는 이가 될까? 결국은 떠날 수 밖에 없는데. 보따리는 언제부터 가벼워지기 시작할까?’

가방은 채우고, 비운다. 터미널의 가방에 익숙하다는 것은 떠나는 연습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읽기에도 낯선 ‘작별’이라는 단어를 일상으로 끌고 들어오는 작업이다.

덜어낸다는 것은, 작아진다는 것은 숙명이다. 비우고 싶지 않아도 비울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저 터미널에 잠시 머물 뿐, 오면 가야 한다. 가면 온다. 그리고는 또 다시 떠난다. 결국 가방 하나, 보따리 하나를 남긴 채.

내가, 당신이 매일이고 쉬었던 숨결은 높은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부정하고 싶어도 그게 여행자의 숙명이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언제부터인가 캐리어로 업그레이 되었던 어머니의 보따리.

서울로 유학을 오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집을 장만하고.

이런 과정을 거치며 수십, 수백 차례 어머니의 보따리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맞았다. 되돌아 보면시골집을 떠나 도회지 유학에 나섰던 고등학교 시절, 청주의 북부버스터미널에서 ‘어머니 보따리 맞이’는 시작됐다. 몹시도 창피했다. 청주여고나 중앙여고 학생들과 우연이라도 마주칠까 봐 조마조마 했었다.

좀 지나 서울에 정착을 하면서 어머니의 보따리는 내 삶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보따리를 받아 들고 어머니와 함께 종로거리를 걸었고, 명동 구경을 했다. 보따리는 우리 둘만 공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이었고, 어머니의 삶과 나의 삶이 맞닿는 접점이었다. 이런 사실에 나는 당당했다.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투박하고 거칠은 촌부였지만 나에게는 어머니였다. 나의 ‘어머니’임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스무 살이나 넘어 뒤늦게. 그게 억울했다.

어찌 보면 도시에 대한 유치하고도 애꿎은 저항이기도 했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도시로부터 어머니를 위해 보상을 받아 내고 싶었다. 어머니의 흘러간 시간을 찾아 주고 싶었다. 그 대상이 왜 도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쪼그라진 어머니의 얼굴에 화가 났고, 그 화풀이를 도시에서 찾으려 했던 셈이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어머니는 “지난번에 구경은 다했으니 이번에는 그냥 가자”라고 말을 건네곤 했다.

어머니의 키가 작아질수록 보따리는 가벼워졌다.

백설기, 시루떡, 인절미, 참기름, 들기름, 고추가루 등을 가리지 않았던 내용물도 속내의와 양말 몇 켤례, 칫솔 등으로 등으로 줄었다. 어느 때 부터인가 보따리 대신 손가방만 들고 어머니는 힘겹게 서울의 막내 아들을 찾았다.

90 훨씬 넘어 수원 누님 집에 머물던 어머니는 3월 어느 날 마침내 세상과 작별을 했다. 새 프로젝트를 맡아 정신없이 지내던 시기였음에도 유독 그 날 따라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한강 시민공원을 모시고 산책을 하던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안절부절했다. 아내의 퇴근 시간에 맞춰 기다리다 저녁 늦게 둘이서 어머니를 찾았다. 마치 나를 기다리기 있었던 듯 어머니는 내 인사말에 희미하게 반응을 보이다 옅은 숨을 몇 차례 몰아 쉬고는 눈을 감았다. 내 손을 잡은 채.

낙상 후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누워 있던 침대 옆에는 예의 낡은 검은 색 가죽 손가방이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지니고 다녔던 손가방. 거기엔 지폐 몇 장, 가족 사진 서너 장, 보험증명서, 세로줄 인쇄의 오래된 책 두 세 권(‘유충렬전’ 등)이 담겨 있었다. 그게 모두였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서글프지도 않았다. 담담하게 어머니의 눈을 쓸어 감겨드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가방을 챙겨 거실로 나갔다.

오늘도 퇴근길에 터미널 대합실을 찾을 것이다. 떠나고 오는 이들의 시간을 쫒아서.

<필자 소개>

-현 (주)SH네츄럴 회장

-전 동아일보 모스크바특파원, 산업부장, 부국장, 미래전략연구소장

-전 채널A 경영전략본부장, 글로벌사업센터장

-전 에너지경제신문사장, 아주경제신문부문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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