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주의 인물열전] "3.1운동은 근현대 민족사 최대 혁명"..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

장원주 기자 승인 2019.02.22 15:16 | 최종 수정 2019.03.14 15:38 의견 0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


[한국정경신문=장원주 기자] 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정부를 포함한 관련 단체들은 대대적인 기념행사 기획·준비에 한창이다. 이런 가운데 가장 바쁜 인물 중 한 명으로 시간을 쪼개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49년 친일파에 의해 와해된 반민특위의 정신과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故)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에 설립됐다. 연구소는 한국 근현대사의 쟁점과 과제를 연구 해명하고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해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하고 있다.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 일제 파시즘 잔재의 청산에 앞장서고 있다.

방 실장은 연구소 설립 직후 '대학생 자원봉사자 1호'로 연을 시작했다. 연구소 회원과 결혼한 '1호 커플', 연구소 근속 20년 1호 등 각종 1호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국외대에서 학원자주화 투쟁을 벌였던 그는 학생운동권의 역사에 대한 무지에 충격을 받고 연구소에 발을 들였다.

방 실장은 "당시 외쳤던 구호가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였다"며 "그런데 민자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뿌리가 일제에 두고 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는 등 운동권 내부의 친일 문제 인식이 부재한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한국외대 족벌 이사 퇴진 와중에 강영훈 전 총리가 만주건국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방 실장은 "역사를 모르는데 어떻게 싸우냐 하는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며 "투쟁의 사유와 맥락을 이해하고 교육하는 것의 중요성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일종의 사명감으로 연구소와 인연을 맺었다고 설명했다.

본 기자는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청파동 소재 식민지역사박물관 내 연구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 내내 쉼 없이 울리는 휴대전화가 최근 그의 일상을 짐작케 했다.

방 실장이 생각하는 역사와 교육의 중요성,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등에 대한 생각을 일문일답 식으로 풀어본다.

-올해부터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 4월 11일로 복원됐다. 지난 2006년 9월 당시 <세계일보>에서 근무했을 때 방 실장의 제보를 받고 4월 13일 아닌 11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기사를 썼던 기억이 난다.
"1990년 민간차원의 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승격하는 과정에서 4월 13일로 바뀌었다. 한국국민당(김구 선생이 조직한 정당) 기관지인 ‘한민(韓民)’과 1945년 임시의정원 속기록 등 각종 자료에 따르면 독립운동 대표자 29명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1일에 중국 상해에 모여 회의를 열어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과 행정기관인 국무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이란 국호와 임시헌장을 제정·공포했다. 특히 1945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 속기록에는 “이날이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성립 제26주년 기념일이므로 의회 개원식과 성립 기념식을 합병 거행하다”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총무처(행정자치부의 전신)는 1989년 국사편찬위원회에 날짜 선정에 대한 검토를 의뢰했는데 당시 일부 편찬위 자문위원들의 주장만 믿고 기념일을 13일로 바꿔 이듬해부터 임시정부 기념식을 치러왔다. 뒤늦게나마 기념일이 바로잡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보도 당시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알러지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류 역사학계에는 자신들의 연구성과에 대해 독특한 온정주의나 사제간에 얽힌 가족주의가 있다. 사료가 아닌 비과학적 본질주의가 근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자료라도 지도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는 관행이 있었다. 이를 '민망함의 네크워크'라고 규정해본다."

-왜 이러한 일들이 발생했다고 보는가.
"역사의 기록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이 국사편찬위원회나 국가보훈처의 연구자가 돼 국가에 부역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결코 공무원이 돼서는 안 된다. '국정교과서' 논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국가는 지원하되 개입하지 않는 '팔거리 원칙'을 지켜야 한다. 연구자들을 공무원급으로 인정해 연구를 장려하되 국가나 해당 기관 수장의 입맛에 맞는 결과 도출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최근 자유한국당에서 불거진 5·18 망언을 보면 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려 했을 때 보수세력에서 색깔 논쟁으로 몰고갔던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의식의 맥락이라는 프레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친일 문제는 동족보다는 '비(非)국민주의'로 봐야 한다. 이는 자신의 프레임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배제하고 학살해야 한다는 논리다. 즉 국체주의가 일제 잔재의 근간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기획하는 전시회도 그러한 맥락인 듯하다.
"기념전 제목이 <3·1자제단>이다. '자제'는 말 그대로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다. 이는 동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던 인물들을 재조명하자는 취지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진화론'을 앞세워 약육강식의 논리로 '독립불가론'을 펼쳤다. 이완용은 '사리를 분별치 못하고 나라의 정세를 알지 못하는 자의 경거망동으로서 일선동화의 결실을 손상하게 하는 근원이다'고 말했다. 윤치호는 '약자가 취할 최선의 방책은 강자의 호감을 사는 것이다'고 했다. 박중양은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도리가 없다. 독립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만큼 프레임은 무서운 것이다."

-연구소 창립 이래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게 친일인명사전 발간 즈음이 아니었을까 한다.
"온갖 반대에도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당시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인 모금을 통해 발간자금을 모아줬다. 이는 동정이 아닌 동참이라는 데 그 의미가 크다. 자료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는 싸움이 아니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다만 언젠가는 되겠지만 국민적 기대에 걸맞는 시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명감이 컸다. 모금 동참과 사전 발간으로 시민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참여하면 된다는 '사회적 효능감'을 입증한 소중한 기억이다."

-올해 정부에서는 임정 100주년 기념에 공을 많이 들이고 있는데 어떻게 평가하나.
"이번 100주년 위원회가 이전과 다른 점은 활동시한이 내년 6월까지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전에 70주년, 80주년 기념위원회 등은 한시적이어서 기념식이 끝나면 바로 해산됐다. 주요 사업은 3‥1운동 기념식이 시작이지만 향후 더 많은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경찰청을 칭잔해주고 싶다. 경찰청은 임정 100주년 태스크포스(T/F)를 설치했는데 '민주경찰 1호 백범 김구' 조명사업을 열심히 하고 있다. 김구 선생이 임정 초대 경무국장이었기 때문에 경찰 1호가 맞다. 이는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를 강력 표명한 것이다. 검사 1호인 이준 열사에 등한시하는 검찰, 신흥무관학교 등 뿌리 찾기에 나서지 않는 국방부에 비하면 경찰청의 노력은 높이 살만하다."

-위원회의 한계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한시기구이기 때문에 위원회에 파견된 연구자들의 발언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정부 관계자들에게 구걸이나 부탁조로 일을 해나가는 상황에 있다. 역사, 특히 독립운동사를 상시적으로 논의할 테이블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 국가보훈처 전체 예산에서 독립운동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3% 미만이라는 점이 어려운 환경을 대변한다.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처럼 독립운동과 관련 국가보훈처에서 독립한 별도의 기구가 필요하다. 가칭 '역사교육위원회' 같은 조직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안의 친일 잔재는 여전히 뿌리 깊은 것 같다.
"일본 아베 총리가 군국주의를 획책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 망언을 쏟아내는 데는 우리 사회의 친일 잔재 미청산에 있다고 본다. 일본 우익 정치인들이 망언을 하는 동력과 용기를 우리 스스로 제공하고 있다는 데 있다. 친일 문제를 간과하고 역사를 과거의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친일 미화 논란 등이 일본의 과거로의 회귀와 연관하지 못하는 게 가장 안타까울 따름이다."

-결국 청산이 돼야 할 텐데 방 실장이 생각하는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시간과 공간 중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방향성만 올바르게 설정된다면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믿는다. 가령 '이완용의 길'을 생각해보면 100년 후 지금의 평가는 어떤가. 지금 비록 늦더라도 지향점과 방향성 설정이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 교육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3·1운동을 놓고 일단 보자. 3·1운동의 근본 정신은 반제국주위와 반봉건주의다. 그런데 우리 역사교육은 단순히 '일본이 나쁘다'고만 가르친다. 당시 제국주의였던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등은 좋다는 것인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으면 우리는 러시아의 식민지가 됐을 것이다. 가정이지만 그때는 '러시아가 나쁘다'고만 가르칠 것인가. 그동안 맹목전 반일주의는 정권 유지에 활용된 측이 강하다. 이는 과학적 역사교육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러 명칭 가운데 <식민지역사박물관>으로 명명한 것도 단순한 친일 청산을 넘어 보편적인 역사 교육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3·1운동의 근본 의의는 무엇인가.
"일제에 항거하는 것과 더불어 '전주 이씨' 왕가에 대한 반대를 천명한 점이다. 이는 민주공화제를 돌이킬 수 없는 이념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고종의 장례식이 열린 3월 1일을 만세운동 시점으로 잡은 것도 의미심장하다. 물론 망한 왕조의 승하를 애도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집결할 것이라는 전술적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숙해야 할 장례식 날에 '불경하게도' 만세를 외친 것은 과거 왕조와의 확연한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당시 만세운동을 조직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신념이 궁금하다.
"3·1운동 이전 기본 정신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에 오롯이 담겨 있다. 주목할 점은 1917년은 러시아혁명이 발생한 해였다. 이는 당시 선각자들이 신문물을 적극 수용하고 세계사적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즉 '국치'가 아닌 '나라는 존재한다'하는 분명한 인식이 존재한 것이다. 황제는 주권과 국새를 포기했지만 결국 주권은 우리 국민이 가져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른바 '3보(寶) 선언'이다. 땅과 백성은 비록 일제 치하에 있지만 주권은 우리에게 있다는 주체적 선언이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그 함성이 잊히지 않는 듯하다.
"3월 1일 만세시위는 단순한 고종 황제에 대한 조문이 아니었다. 김구 선생의 장남 김인 지사의 묘비명에는 3·1운동과 관련된 사람들을 '혁명자(者)'로 명기했다. 즉 '3·1대혁명'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후 4·19의거,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항쟁, 촛불혁명 등은 민주공화제를 유지 및 수호하기 위한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후 가장 커다란 대혁명이 바로 3·1운동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연구소 설립도 어느덧 30여년이 다 돼간다. 그동안 아쉬운 점을 꼽자면 무엇인가.
"1999년 8월 친일인명사전 발간 지지 교수 1만명 서명을 받았는데 언론 보도가 거의 없었고 사회적 반향도 얻지 못해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지금 현재가 가장 힘들다. 보수정권일 때는 오히려 시민단체 활동이 왕성하고 회원수도 늘어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서 방향성을 잘 잡고 역사를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회원 수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웃음) 하지만 효창공원 성역화 사업 등 잠복된 화두들이 많다. 역사 바로세우기와 친일 청산은 10년간 내 재부상할 것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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